생각이 만든 감옥 – 맨리 p. 홀 북 간략 줄거리 요약

생각이 만든 감옥

생각이 만든 감옥

목차

두려움의 실체와 해법

죄책감에서 꺠달음으로

생각의 독재로부터 탈출하는 방법

두려움의 실체와 해법

과거 사람들은 현대 사람들만큼의 변화를 겪지 않았다. 그래서 비교적 마음의 안정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는 너무나 빠른 과학의 변화, 시대의 변화로 개인의 인생에 있어 크게 변화를 맞게 된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불안하게 만든다. 집단적으로도 불안하고 개인적으로도 불안한 것이다. 이럴때 개인은 집단에 휘말리지 않고 마음을 편안히 가질 수 있을까?

두려움의 해소 : 어떻게 두려움에 맞서야 할까? 우선 우주는 법과 질서에 따라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움직이며, 우주 자체는 본질적으로 위험하지 않다는 것부터 이해해야 한다. 자연은 우리가 태어나 죽을 때까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고통은 관계에서 생겨난다.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받은 판단력, 이성, 이해의 도구를 올바르게 활용하여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원초적 본능을 이겨내기 전에는 문제가 알아서 사라지지 않는다. 내면의 자산을 활용하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는 집단적 압력의 피해자 신세를 피할수 없다. 불안함에 대한 유일한 해법은 나와 불안감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 뿐이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문제를 직시하고 가장 효율적인 해법이 무엇인지 고민해봐야 한다.

인도의 고전 바가바드 기타에는 ‘불가피한 것에 대해서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쓰여져 있다. 따라서 죽음은 두려움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불안감과 두려움을 다룰때는 인간의 힘으로 바꾸고 고칠 수 있는 일과, 인간이 노력해도 절대 바꿀 수 없는 문제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감당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한 인간은 균형을 되찾기 위해 본능적으로 진짜 힘이 있는 원천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 힘의 원천은 바로 내면의 삶, 영적 삶이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 세상이 나를 지켜줄 수 없을 때, 끝까지 나를 배신하지 않는 내면의 힘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종교와 철학은 인간이 올바르게 행동했을 때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우주의 법과 질서를 받아들였을 때 보호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전한다. 그러나 종교와 철학은 대부분 지금과 다른 시대에 탄생했다. 우리와 다른 시대에 살면서 다른 문제를 겪었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사상이기 때문에 현대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현대의 철학과 종교, 특히 종교의 가장 큰 단점 중 하나는 전 세계를 하나로 묶는 보편적인 신앙의 부재이다. 모두가 공감하고 수용할 수 있는, 모두가 안전을 성취하고 도덕심을 기르도록 돕는 영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두려움이 찾아왔을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는 가치관의 재확립이다. 두려움은 내게 주어진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나의 반응ㅇ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위기에 처한 사람이 느끼는 두려움의 강도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내적 자산의 수준에 의해 정해진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은 나의 삶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보는 것이다. 정직하게 자신을 되돌아보면 실용적이고 객관적인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두려움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침착하게 하나씩 분석하고 집계해보는 것이다.

솔직한 마음으로 나를 분석하면 중요한 사실을 몇가지 발견한다. 그중 하나는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일이 결국에는 일어나지 않았고, 쓸데 없이 두려워하며 에너지를 낭비한 적이 참 많았다는 점이다. 우려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하더라도 두려움에 겁먹은 상태에서 제멋대로 확대하여 해석하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아서 위험한 일이라 부르기 민망한 경우도 많다. 또한 진짜 위험이 다쳤을 때 내가 평소보다 큰 능력을 발휘했었다는 점이다. 내 안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힘, 용기, 이해, 통찰이 갑자기 솟아났던 일들을 떠올릴 수 있다.

두려움의 감정이 위험한 이유는 해법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방해하고 현실을 바라보는 시야를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상황 속에 깊게 빠진 상태이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심리적 포로가 된 사람이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는 휴식을 취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긴장을 풀어버림으로써 스트레스가 시야를 흐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취미 활동도 두려움을 이기는 좋은 방법이다.

단순함의 진리를 발견 한 후에는 쓸모없고 가격만 비싼 소품에 의지하지 않고도 값지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인간은 신념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래를 지향할 수 있다. 자연이 선물한 능력과 힘으로 안전을 구하는 방법을 터득한 다른 존재들과도 협력할 수 있다. 두려움을 양식으로 먹고 사는 사람은 야만인이다. 야만인은 짐승처럼 남을 할퀴고 , 깨물고, 증오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삶의 질서를 잡는 것이다. 두려움은 무지를 입증하는 최후의 징표이며, 가치와 현실을 무시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질서의 출발이다.

불안감에 쉽게 빠지는 사람이 제일 먼저 해야할일은 불안감의 대상을 자세히 살펴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따져보는 것이다.

우리에게 해만 끼치는 악성 종양(두려움)을 제거하는 일을 왜 형벌로 여겨야 하는걸까? 우울하게 사는 것이 정당한 권리이고, 자유와 개성의 표현인가. 그런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무슨 바람직한 일이라도 되는가. 나에겐 우울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도 신념인가. 그처럼 어이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나에겐 나의 인격과 안전을 해치는 상황에 맞서 싸우고 승리할 권리가 있다’로 바꿔야 한다.

생각을 조금만 긍정적인 방향으로 수정하면 삶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내가 남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삶에 대한 관심과 의욕이 커지면 두려움의 가장 큰 원인인 ‘목적의식의 부재’도 점차 해소된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은 끔찍한 공포와 ㄷ려움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최고 적임자이다. 오로지 나에 대한 생각에만 파묻혀 자기가 정녕 살아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사람은 육신이 영원하지 않다는 진리도 이미 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자기의 딱한 처지를 비관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두려움은 사회생활을 파괴하고 인간을 외롭게 만든다. 두려운 사람은 자기 생각에 너무 깊게 빠져있는 사람이며 자기 생각에 빠진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제일 작은 사람이다.

평온한 마음과 올바른 시각을 갖고 싶다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반사회적 장벽부터 허물어야 한다.두려움에 떨면서 항상 슬픔에 잠겨 있고, 비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부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사람은 좋은 친구나 동료가 될 수 없다. 낙천적인 자세로 즐겁게 사는 사람들이 손을 내밀지도 않는다. 결국 외톨이가 된다. 혼자 두려움에 떨며 우울하게 살아가는 시간만 늘어나는 것이다.

두려움 앞에 굴복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다는 만물에서 옳은 면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느라 힘든 편이 훨씬 낫다. 비록 현실이 내가 원하는 모습과 다르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배울것이 분명히 있다. 버티는 것이 아니라 적응하는 것이 관건이다. 대부분의 고통은 적응하지 못할 때 생긴다. 적응하지 못해서 계속 삶과 마찰을 일으키고, 그 마찰로 인해 삶의 면역력이 약해지고, 결국엔 본인이 닳고 닳아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종교나 철학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사람, 자연의 법칙과 계획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위기에 처했을 때 본인의 신념에 의지하고, 그 신념에 따라 살기 위해 계속 노력하길 바란다. 우리에게는 나에게 힘을 주는 것들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

우리는 두려움에 대해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 큰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지혜롭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면 ‘나는 벌 받아 마땅하다’는 불안감도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누구나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신이 우리에게 그런 능력을 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노력까지 더해지면 두려움을 정복하고 건설적이고 보람찬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다.

죄책감에서 깨달음으로

어떤 면에서 봤을 때, (특히 서양 문화권에서) 인간은 자기의 종교적 신념과 우울한 처지를 결부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서양 종교는 경계하는 눈초리로 행복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물질 세상에서 행복한 인간은 장차 다가올 큰 불행을 피할 수 없으며, 인간은 오로지 원죄를 씻어내기 위해 이곳에서 고생하는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는 식의 사상을 전파한다. 많은 서양인들이 어려서부터 종교를 통해 두려움에 익숙하다. 육신을 가진 인간의 나약함은 고려하지 않은 채 인간이 조금만 실수하면 가차 없이 형벌을 가하는 신적 존재가 우주 전체를 매순간 감시하고 있다는 식으로 세뇌를 받는다. 두려움으로 신도들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종교를 배경으로 성장한 사람은 노년에 이르러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 어려서부터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 죄악이라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란 사람은 온 세상이 악으로 뒤덮여 있고, 자기의 영혼은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으며,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다’는 죄인 의식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두려운 마음을 강조하는 종교, 신을 자애로운 부모 대신 잔인한 폭군으로 묘사하는 종교, 인류가 겪고 있는 문제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신을 숭배하는 종교의 교리에 중독된 사람은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죄악에서 비롯되었다고 확신한다.

종교적 삶의 목표는 자신에게 형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것을 모두 나쁘게 해석하는 습관이 굳어지면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인간은 매 순간 자신을 초월한 상태를 유지하며 성인군자처럼 살아가도록 설계된 존재가 아니다. 속세의 모든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한평생 청교도적이고 금욕적인 삶을 실천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작은 행동까지 의심의 눈초리로 노려보고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ㅎ다. 그랬다간 도대체 어디쯤에서 선을 그어야 할지 몰라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죄책감의 근원으로 가정과 성장배경이 있다. 많은 사람이 희한하고 비합리적인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워하고, 온갖 스트레스와 긴장에 굴복하며 가슴이 가리키는 바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신을 미워하는 것은 물론이고 죄책감이 잠재의식 깊은 곳에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자기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있지도 않은 이유로 자신ㅇ르 학대하고 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은근히 즐기는 사람들마저 생겨났다.

우리가 힘든 이유는 우리가 고통받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받을만한 짓을 했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원죄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일방적 피해자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마음의 평온을 얻으려 한다. 내 탓이 아니라고 계속 부인하는 것이다. 내가 벌 받을만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기보다는, 고통이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하기 때문이다.

신경이 날카로운 아이가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를 진리로 여기고 세뇌되면 쉽게 균형이 무너지며, 세상 전체가 자기처럼 불행해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비뚤어진 성인으로 자라나게 된다. 만사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이 가엾은 영혼은 행복하고 낙천적인 사람을 모두 싸잡아서 바보로 매도한다. 우울한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미치광이임에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종교나 전통을 저버리는 행동을 한 후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공황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자신이 공황 상태에 빠졌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하고, 만사에 대해 부정적인 자세를 가진 사람으로 돌변하여 간접적으로 죄책감을 드러낸다.

날마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듯이, 삶을 두려워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낙천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세상에서 안좋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현실도 분명 인식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안전을 구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살아간다. 그는 삶은 기본적으로 좋은 것이고, 누구나 올바른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사회의 피해자가 되어야 할 필요도 없고, 세상이 무너진다 해서 자기도 무너져야 하는 법은 없다는 자세로 삶에 임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내면에 씻을 수 없는 죄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죄책감에 얽매여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을 학대한다. 인생을 망쳤거나, 결혼 상대를 잘 못 골랐거나, 자녀를 똑바로 키우지 못했거나, 친구들로부터 신뢰를 잃었거나, 경제적으로 앞가림을 못해서 그런 죄의식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이런 일련의 시련을 겪으며 세상이 나를 미워하고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 것이다.

재앙은 잘못된 생각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에 함몰되어 병적으로 자신을 비하하고 학대하는 사람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물론 누가 봐도 자명한 세상의 어두운 단면을 보고 낙천적인 생각을 가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대해 의심을 품고 걱정하는 와중에도 옳은 것의 가치를 인정하고, 선은 궁극적으로 승리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세상은 신성한 원칙과 법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자멸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세상의 부정적인 일들은 물론이고 내가 저지른 잘못까지도 모두 신의 계획에 따른 것이며, 신의 계획은 인간을 벌하는 것이라는 변명으로 나의 잘못을 정당화하고 그 책임을 신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잘못 세뇌되면 삶을 곡해하고, 삶을 성장의 기회가 아니라 억압의 도구라는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종교의 가르침을 곡해하면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태를 필사적으로 개조하려는 함정에 빠지게 되고, 그 결과 좌절과 실망으로 가득한 인생을 살게 될 수 있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시도하다가 실패하는 이유로 자신을 비난하고, 회한에 잠기고, 죄책감을 느끼고, 증오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같은 제약 조건을 안고 살아간다. 나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더 우울하고 불행해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엉뚱한 일에 대해 회개하고 있다. 자기가 슈퍼맨이 아니라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그렇게 비생산적으로 시간을 낭비하기 보다는 주변사람들에게 사랑과 친절을 넉넉하게 베풀지 않은 것부터 뉘우치고 회개해야 한다.

죄책감은 매우 비합리적이고 무책임한 생각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진짜로 책임을 통감하고 자신을 힐책해야 할만한 일들은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되겠답시고 나서지만, 나의 다혈질적인 성격, 의심하는 마음, 시기와 질투심은 보지 못한다. 비뚤어진 관점 때문에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흠을 질책하고, 진짜 단점은 문제가 될 것 없다는 식으로 태연하게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선도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는, 인간의 의식은 수시로,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한시도 같은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매 순간 새롭게 변한다. 그런데 우리는 20년 전의 나를 회상하면서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20년 동안 많은 경험을 쌓고 성장 또는 퇴보 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을 탈바꿈 됬는데 지금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20년 전의 나를 평가하는 것이다.

과거에 연연하며 계속 슬퍼하고 후회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 과거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과거이기 때문이다. 그 과거는 10대 중반에 현실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상상력 뛰어난 낭만주의자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예전에 경험했떤 것과 똑같은 상황이 찾아왔을 떄 지금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면 진짜 심각한 문제이다.

실수 안에 이미 형벌이 들어있다.

자연은 한 번의 잘못에 대해 여러 번 처벌하지 않는다. 자연은 30년 전에 저지른 작은 실수 하나 가지고 죽는 순간까지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자연이 내리는 형벌과 보상은 합리적이고 공정하다.

오래전에 저지른 작은 실수 하나 때문에 지금까지 괴로워하고 있다면, 그 고통은 묵은 옛 실수가 아니라 아무런 근거 없는 나의 엉뚱한 생각에서 솟아난 것이다. 별로 중ㅇ요하지도 않고 잊어버리면 그만인 일을 풍선처럼 크게 부풀리고 계속 살려내면서 병적으로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한 후에는 빨리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최선이다. 어짜피 언젠가는 반드시 상환해야 할 빚이고, 자연에 진 빚을 뗴어먹는 법은 없다.

지금 실수를 반복하고 있고, 그 결과 때문에 불행하다면, 인과관계의 법칙이 아주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고, 잘못이 있으면 대가를 치르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잘못된 행동을 중단하겠다고 마음을 먹는 즉시 두려움, 고민, 의심도 눈처럼 녹아내린다. 자연은 한 번의 실수에 대해 반복적인 형벌을 내리지 않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반복한 만큼 계속 같은 형벌을 내린다.

나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답은 ‘나의 느낌’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 창의적이고 건설적이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지 않다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을 반복하면 병이 난다. 하지만 잘못을 바로 잡는 순간 빚은 다 청산된다. 나의 잘못을 발견하고, 바로잡고, 나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를 최대한 배상하기 ㅜ이해 노력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갚아야 할 빚이다. 이렇게 마음속에서 문제를 정리하고 나면 우리는 복수의 우주 안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고통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는 성장하기 위함이다. 우주의 법칙은 정의롭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한결 즐거운 마음으로 성장할 수 있다. 자연은 한번의 실수에 대해 꼬투리를 잡고 무한토록 형벌을 내리는 복수의 화신이 아니다. 영원하고 반복적인 형벌은 우리가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부정적인 패턴에 불과하다. 이 점을 명심하면 보다 건설적이고 목적의식 있는 삶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의 독재로부터 탈출하는 방법

조상들은 최소한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는 이상의 중요성을 인지했다. 현대인들이 불편하게 느끼며 외면하려고만 하는 그 진정성 말이다. 우리는 인류의 장기적인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이상적 기반을 복원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황금률의 가르침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다.

그런데 이 진정성이라는 것은 매번 인간의 이깃미과 충돌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진정성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살겠다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에 제동을 건다. 인간은 육신의 자유를 얻기 위해 목숨까지 걸고 필사적으로 투쟁하며, 그 결과 오늘날 많은 사람이 육체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이 육체적, 개인적 자유에는 진정성이 결여된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이 ‘나에게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살 권리가 있다’고 부르짖는다. 하지만 욕망의 근원을 다스리고 바로잡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의 원칙’과 ‘눈에 보이는 인간의 활동’ 사이에 갈등이 있다. 이 갈등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물질주의의 강력한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물질이 인간의 삶에 직접 작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물질 때문에 걱정거리가 생기는 것도 알고 있다. 물질을 기반으로 하는 모든 해법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원칙과 이상을 바탕으로 한 진짜 해법은 감을 잡기 어렵고 쉽게 자각할 수도 없기 때문에 무시된다. 물질적 해법을 기대할 수도 없고, 이상적 해법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날이 갈수록 신념이 약화된다. 눈에 보이는 걱정거리에는 쉽게 중독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의 힘은 조금씩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그 결과, 이상이 결여된 거대한 물질문명이 탄생하게 되었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났다. 내면의 신성을 체험하는 순수한 용도로 만들어진 종교 기관들이 신학의 덫에 걸려버린 것이다. 신학은 믿음을 표준화하고 인간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종교관과 무관하게 기관에서 정한 교리와 정책을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

종교가 점차 신학으로 변질되면서 고대의 사제들은신학자가 되었다. 신학자는 교리와 원리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기가 만든 틀에 신앙을 가두고 오로지 자기가 정한 교리만이 절대적이고 필연적이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상황은 종교개혁의 시대까지 이어졌다. 종교계에서 일대 혁명이 일어나면서 암울했던 중세 시대도 비로소 막을 고하게 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는 여러 조각으로 분열되었다. 신에 대한 독창적인 개념과 신앙을 표방하는 종파들이 여기저기서 부상했다. 그리고 자기들의 신앙만이 옳으며 다른 종파들은 모두 굴복해야 한다는 확신에 찬 분파들 간의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인생이라는 미스터리의 표면에만 머무르다 보니 많은 사람이 쉽게 포기한다. 세상에 의미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자괴감에 빠져버린다. 하지만 인간은 세상의 거의 모든 신비를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실천하기 몹시 어려운 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은 자연의 법칙이 실현되는 거대한 원형극장 같은 곳이라느 ㄴ관점에서 한번 생각해보길 바란다. 우리는 우주 만물이 어떤 법칙을 따르고(때로는 그 법칙이 불공정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이 질서에 따라 분류되고 통제되는 세상에 살고있다. 우주의 질서를 구현하고 관장하는 신의 손이 보이지는 않지만, 결코 변형될 수 없는 법칙이 이 세상에 작용하고 있따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자연에서도 이 법칙의 실재를 확인할 수 있다. 자연의 법칙은 오늘날 인간ㅇ르 괴롭히고 있는 모든 문제를 이겨내는 것 쯤은 물론이고, 자연을 파괴하려는 인간의 가소로운 의도를 가볍게 눌러버릴 수 있는 수단, 지식, 의식, 진리의 힘도 보유하고 있다. 우주의 시스템은 결코 인간의 손에 의해 파괴될 수 없다.

비관주의에 빠지면 세상 모든 것이 다 부질없게 보인다. 내가 하는 일도 다 의미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갈수록 용기를 잃으며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하고 정도가 심해지면 차라리 자살하는 게 낫겠다는 절망감에 이를 수도 있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태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않는다. 생명을 파괴하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다. 모든 것이 다 부질없다는 생각을 버리고 행동을 바꾸기로 한 후에는 우주의 법칙이 나의 삶에 작용하는 원리를 관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세상이 우울해진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원인과 결과의 상관관계를 관찰하고 이해함으로써 인간은 불변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고, 고통을 최소화 하기 위해서는 이 법칙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한다.

나부터 바로 세우는 것이 핵심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주는 공정하다는 기본적인 확신이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일어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인과관계의 법칙은 언제나 정확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이 법칙은 독재자처럼 우리 머리 위에서 군림하지 ㅇ낳는다. 과거에도 그랬던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인과관계의 법칙은 부당한 형벌을 부과하지 않으며, 정당한 보상을 빼앗아가지도 않는다. 인과관계의 법칙은 우리가 갖고 싶은 좋은 것들은 가질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주어진다고 말한다. 행복도, 안전도, 자격이 있는 자만 누릴 수 있다. 비즈니스에서 말하는 안전이 아니라, 소중한 가치를 내 안에서 받아들였을 때 얻어지는 진정한 안전을 말하는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 나의 소망과 나의 욕망을 잠시 뒤로 하고 나보다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왔을 때 얻을 수 있는 큰 효과가 하나 있다. 남을 돕는 동안에는 나(에고)를 일시적으로나마 잊어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자아에 얽매여 있는 사람은 가장 큰 위기에 빠진 사람이다. 삶을 개선하는 건설적인 방법은 이 외에도 많다. 종교의 가르침을 통해 삶의 본질을 배우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걱정해서 사라지는 문제는 없다. 인간은 고요한 상태에 도달했을 때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 고요함은 걱정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걱정하는 것보다 더 심오하고, 소중하고, 유용하고 나은 방법이 있다느 사실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걱정이 지나치면 나와 신성을 연결하는 고리가 끊어진다. 아무리 정당하게 여겨지더라도 비판, 비난, 분노는 내면을 억압하고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밖에서 벌어지는 문제에 집착할수록 내면의 힘을 발휘하는데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만 더 많이 소비된다.

상습적인 걱정 중독자가 이 나쁜 버릇을 고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는 걱정의 패턴을 깨트릴 수 있는 분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물질적으로는 중요하지 않을지라도 내면의 이해와 통찰을 밖으로 배출하는 데 도움이 되는 활동을 개시하는 것이다.

종교는 일상에서 신과 선을 발견하는 안목을 키워준다. 진정한 종교인이라면 무엇보다 삶의 특권을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거둬달라고 신에게 앙탈이나 부릴일이 아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 동안 우주를 지배해 온 법칙의 작용에 의해 세상에 태어났다. 각자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신성한 불꽃을 활짝 펼치기 위해 온 것이다. 우리가 아름답고 선한 행동을 할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영원불멸의 신이 세상에 조금씩 그 모습ㅇ르 드러낸다. 반면 우리가 불평불만을 쏟아낼 때 마다 신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더욱 깊게 봉인된다. 일상 속에서 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신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과제를 내주는 선생님과 같은 존재이다. 우리 안의 영적 자산을 썩히지 않고 활용하여 배로 늘리도록 계속해서 자극하는 존재이다.

‘진짜 위기’란 옳지 않은 선택을 내리는 것이 진짜 위기다. 올바른 삶의 바탕이 되는 원칙을 망각했을 때 위기가 터지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일들은 위기가 아니다. 세월이 흘러 육신이 늙고 병드는 것은 위기가 아니다.

자연은 인간이 오로지 야망을 채우기 위해 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자연은 인간이 약간의 야망ambition과 원대한 열망 aspiration을 품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열망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고 야망은 ‘더 많이 가지고 싶은 것’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록 더 많이 가지고 싶다는 욕망도 줄어들며, 물질 때문에 괴로워하는 일도 사라진다.

전부 다 정신에서 비롯된 문제들이다. 부정적인 태도와 생각이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처럼 태도와 생각을 반대 방향으로 바꾸면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도 있다. 내가 우울한 이유는 내가 계속 잘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이해하면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해법은 간단하다. 실수를 그만 저지르면 행복해지는 것이다. 방탕한 삶과 사치를 위해 재산을 펑펑 탕진하는 물질적 쾌락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평온한 관계를 맺었을 때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참된 행복, 주머니 사정과는 무관하게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행복, 열심히 일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노동의 몫을 다하고 정직하게 일한 대가로 정당한 보상을 받고 신이 원하는 바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갔을 때 얻을 수 있는 행복, 인간이 제정한 법률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우주의 법을 준수했을 때 만끽하게 되는 진짜 행복을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