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ow 칙센트 미하이 1장 요약
1장 행복, 다시 생각해보기
이책에 대해서
불만족의 근원
문화라는 방패
스스로의 경험 결정하기
해방의 길
2300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세상 무엇보다도 행복을 더 추구한다” 고 단언한 바있다. 행복이란 그 자체로서 추구되지만, 그밖에 다른 것들, 이를테면 건강, 아름다움, 부와 권력 따위들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추구된다.
이 책의 목적은 매우 오래된 의문, 즉 인간은 언제 제일 행복할까라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최근 심리학의 지식과 방법을 적용해 보는 것이다.
25년전 나는 어떤 ‘발견’을 하게되었다. 그 발견은 “행복이란 것은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이다.
실제로 행복은 우리가 준비해야하고, 마음속에서 키워가야 하며, 사라지거나 빼앗기지 않도록 스스로 지켜내기도 해야하는 특별한 것이다. 자기 내면의 경험들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삶의 질을 결정할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의식적으로 찾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네 스스로에게 지금 행복하냐고 물어보는 순간, 행복은 달아난다.”고 철학자 밀은 말했다. 행복을 직접적으로 찾을 때가 아니라 좋든 싫든 간에 우리 인생의 순간 순간에 충분히 몰입하고 있ㅇ르 때만이 행복은 오는 것이다.
행복은 어떻게 찾는가? 그 해법이라는 것은 직접적인 통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서 가능하다. 즉 우리 의식의 내용을 조절하는 방법에서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최적 경험(optimal experience)
이 경험은 캔버스 위의 여러 색들이 마치 자석의 힘에 이끌리듯이 서로서로 뭉치면서 생명력을 갖는 형태를 만들어 갈 때 이를 창조한 화가가 느끼는 것과 같다. 최적 경험은 외부적인 여건이 좋을 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일상적인 순간, 생과 사를 오가는 순간에서도 가능하다. 이런 순간들은 우리가 어렵지만 가치 있는 일을 이루기 위해 최대한도까지 스스로의 마음과 육체를 바쳐 자발적으로 전력 투구할때에 일어난다. 따라서 최적 경험은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노력해서 만드는 것이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강렬한 자각, 바로 이러한 느낌이 우리가 염원하는 행복에 가장 가까운 상태가 아닐까?
플로우 : 사람들이 다른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을 정도로 지금 하는 일에 푹 빠져 있는 상태. 곧 이때의 경험 자체가 매우 즐겁기 떄문에 이를 위해서는 어지간한 고생도 감내하면서 그 행위를 하게 되는 상태
이 책에 대해서
이 책은 플로우라는 최적 경험과 관련된 연구 결과가 각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ㅇ을 줄 수 있는지를 일반 독자들을 위해서 서술한 최초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인생이 좀 더 즐거울 수 있는가’라는 목표를 향해서 추상적이 아닌 구체적인 사례들을 나의 이론에 맞추어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독자들이 그 사례들을 자양분으로 삼아 스스로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바로 이것이 내가 이 책ㅇ르 쓰는 목적이다.
내적 경험의 최적 상태는 의식이 질서를 가지고 움직일 때이다. 이 최적 상태에서는 우리의 심리적 에너지인 주의가 구체적인 목표에 집중적으로 투자되며, 우리가 갖고 있는 기술(능력)이 최적의 상태로 활용된다. 목표를 추구할 떄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목표 외의 다른 것들은 잠시 잊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의식에 질서가 생기게 된다. 이런 까닭에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적인 과제들을 완수해 보려고 애썼던 시간들을 우리가 나중에 돌이켜 보면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자기의 심리적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그 결과 이 에너지를 의식적으로 원하는 목표에 쏟아 넣는 사람들은 성숙한 인간으로 변화해 나갈 것이다. 또한 그가 가지고 있는 기술 수준을 향상시키고 좀더 어려운 과제에 도전함으로써 점차 ㄷ특별한 인간이 될 수 있다.
사람이 스스로의 삶을 통제한다고 느낄 때, 그러면서 이런 경험의 심대한 중요함을 통찰하는 순간에는 사회적 욕망이 사그라든다. 이젠 내가 날씬하지 않다는 것, 부자가 아니란느 것, 그리고 권력을 가지고 있찌 못하다는 것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끝없이 출렁거리는 ‘기대’라는 파도는 잔잔해질 것이고, 이루어지지 못한 ‘소망’들도 더 이상 우리 마음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가장 하찮은 경험들도 이때부터는 즐거운 것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의식을 통제할 수 있는가? 우리의 경험을 더욱 즐겁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의식이 질서를 찾ㅇ르 수 있는가? 질서를 찾기 위한 복합적인 상태는 어떻게 달성되는가? 어떻게 우리 주변에 있는 사물들에 대한 의미가 재창조 되는가?
어떻게 하면 최적의 플로우 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기에 앞서 이를 방해하는 인간의 조건들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주는 우리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 좌절은 인생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또한 우리의 기본적 욕구들이 채워지는 순간 또다시 우리는 다른 것을 원하게 된다. 이런 만성적ㅇ니 불만족이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두 번째 이유이다. 오직 우리들의 내적인 경험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것과, 삶의 매순간을 즐길 수 있는 능력만이 행복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극복하게 만들어 줄 수가 있다.
불만족의 근원
행복을 쉽게 얻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우주 자체가 인간의 안위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로부터 찾을 수 있다. 수학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우주가 무질서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행성의 궤도나 에너지의 전환처럼 우주는 예측과 설명 가능한 원리를 따른다. 문제는 자연의 법칙들이 우리의 소망과는 아무 상관없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들은 우리가 삶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만들어가는 원리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원리대로 움직인다. 홈스의 말을 빌려보자 ” 우주는 우리의 적이 아니다. 그렇다고 친구도 아니다. 단지 인간들의 관심사에 대해서는 무심할 뿐이다.”
철학자 밀의 말을 인용해보자. ” 인간 사고 방식의 근본적인 개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삶의 질의 향상은 기대하기 힘들다.”
우리 자신에 대한 느낌, 살아가면서 얻는 기쁨은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마음이 일상 생활에서 겪는 경험을 어떻게 취사 선택하고 해석하는지에 달려있다. 우리가 행복한가 아닌가는 외적 세계의 영향들을 어떻게 통제하느냐보다 마음의 조화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더이상 이런 것들에게서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새로운 욕구와 욕망이 샘솟기 시작한다. 끊임없이 높아지는 욕망의 역설적 상황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일이 과연 가능할 것ㅇ니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사실 우리가 높은 목표를 가진다는 것은 이를 이루기 위한 과정을 즐기면서 노력하고 있다면 하등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목표를 이루는 데 너무 집착한 나머지 현재 삶으로부터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데에 큰 문제가 있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면, 더 이상 자신의 삶에 대해 만족을 느끼기도 힘들어지는 것이다.
문화라는 방패
원래 인간의 욕망에는 무관심한 것이 우주 자연일진데, 자연이 우리만을 지켜 줄 ㄱ ㅓㅅ이라는 문화적 교만이 문제가 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한때 자신들이 그렇게 믿었ㄷ너 것들이 완전히 허상임을 깨달았을 때 그들이 배워 왔던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믿음은 내팽개쳐지고 만다. 이젠 자기들을 지켜 주었었던 전통 문화적 가치들이 사라졌단느 것을 깨닫고 불안과 무관심 상태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불만족의 뿌리는 우리 내부에 있으며 우리들 스스로의 의지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우리 내면의 혼돈 상태는 존재론적 불안 또는 실존적 공허라고 불리는 우리의 정서 상태에서 잘 드러난다. 분질적으로 이 상태는 삶에 대한 불안, ㅏㄻ이 무의미하다는 ㄴ느낌, 더 이상 존재할 의미가 없다는 느낌을 말한다.
“이게 정말 내가 꿈꾸던 인생의 전부란 말인가?”
생명의 유한성은 우리에게 “자, 이제 너의 시대는 끝이야, 다음을 준비할 수 밖에 없어”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뭔가 속았다는 느낌, 억울한 느낌은 현실을 깨닫는 순간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어릴 때부터 우리들은 모두 축복된 앞날이 우리를 기다릴것이락 ㅗ믿는다. .. 그러나 세상이 반드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이런 슬픈 현실을 깨닫는 순간, 사람들의 반응은 서로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 또다시 새로운 노력을 경주한다. 때로는 이런 노력이 유효할 때도 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한 경쟁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행복이 전혀 다가오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걸음만 물러나서 반성해 보면, 이런 노력들이 결국 헛된 것이었다는 사ㅅ실을 깨닫게 된다. 즉 돈, 권력, 지위 그리고 물질적 소유 등이 그 자체로는 절대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 말이다.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논력이 무용지물이 되면, 어떤 사람들은 아예 포기하고 세상으로부터 은둔하기도 한다.
행복하지 못한 사회
스스로의 경험 결정하기
현대의 삶에서 느끼는 불안과 우울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가 제공하는 당근과 채찍의 달콤한 매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자세를 취해야한다. 이러한 자율성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행동에 대해서 스스로 상도 주고 벌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외적 여건이 어떻든지 간에 스스로 즐거움과 삶의 목적을 발견해 나가는 능력을 개발해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는 쉽다고 할 수 도 있고 어렵다고 할 수도 있다. 쉽다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점이고 어렵다는 것은 어느 시대에서도 쉽지 않을 자기 단련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경험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가에 관하여 자기 삶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에머슨이 말한것처럼 “살아가려고 바동대기는 하지만, 정말 삶을 살고 있는것일까?”
훗날의 영광을 위해 고진감래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필요한 덕목이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시피, 문명이란 것은 사람들의 욕망을 억압한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회 구성원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술이나 규범을 습득하지 않는다면 사회의 질서나 노동의 분화 등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사회화 과정, 즉 인간을 사회의 유용한 구성언으로 변화시키는 것ㅇ느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는 하다. 사회화의 목적은 그 구성원을 잘 통제할 수 있고 사회에서 주는 당근과 채찍에 따라서 예측 가능한 반응을 하도록 만드는 데 있따. 가장 잘 된 사회화의 형태는 구성원들이 사회의 질서를 완전히 내면화한 나머지 이를 어기고는 한 순간도 살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통제라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생존을 위협해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의 편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종족 보전을 위한 유전자의 반사적 반응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문제는 ‘필(feel)’ 을 느끼는 것만이 본질적인 것이라는 최근의 시대적 흐름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가장 신뢰하는 것이 ‘본능’이다. 좋은 느낌이 오면, 그리고 그 느낌이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생겨났다면 그것은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우리를 통제해 왔던 사회적이고 유전적인 힘들을 아무런 의심없이 무조건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곧 자기의 의식에 대한 통제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대의 ‘실재론’은 과거 시절 ‘운명론’의 변화된 형태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자연스러운 본능을 따라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모순적 표현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유전적 프로그램에 복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 스스로 무기력해지고 만다. 필요한 상황에서 유전적 지시를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은 매우 허약해진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건강하고 독립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본능적 욕구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이 욕구를 조작하는 남들에게 당하기 쉽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회가 제공하는 보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이를 위해서 어떻게 사회적 보상들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보상으로 대체하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사회에서 원하는 일들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 일들 이외에 우리 스스로의 목표를 만들라는 것이다.
자신을 사회적 통제로부터 해방시키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순간 순간에 주어지는 보상을 발견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경험의 흐름에서 주어지는 의미를 발견하고 즐길 수 있다면, 그의 어깨를 무겁게 누륵 ㅗ있는 사회적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보상을 자기의 내면에서 찾을 수 있따면, 그 동안 사회에 맡겨 두었던 본인의 힘을 다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몸이 원하는 것으로부터 독립적이 되어야 하며, 우리 마음속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고통과 쾌락은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며 그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현실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을 통제하고 외부의 꼬임과 협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
로마 제국의 철학자 에픽테토스 : “사물 자체가 무서운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물을 지각하는가, 단지 이것이 무서울 뿐이다.”
아우렐리우스 황제 : “네가 외적인 일들로 인해서 마음 고생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일들 때문이 아니라 네가 그것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에 의해서다. 그 평가와 판단을 한꺼번에 지워버릴 수 있는 것도 너의 손안에 달려있다.”
해방의 길
“마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달라진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기 위해서 날뛰는 두개의 폭군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개인의 본능적 욕구인 이드(id). 다른 하나느 사회적 압력의 종인 초자아(superego). 그리고 이들과 맞서는 것이 자신의 본질적 요구를 대변하는 자아(ego)이다.
요가나 중국의 도교 그리고 불교의 선 등은 모두 우리의 마음을 외적 유혹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그것은 마음의 무질서함(chaos)이 주는 협박으로부터, 본능적인 욕구로부터, 또한 사회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유로워지는 방법과 자신의 삶을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을 수천년전에 알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왜 우리는 아직도 이 방법을 더 발전시키지 못했을까? 여기에는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다. 우리의 의식에 해방을 가져다주는 현명함이라는 지식은 본질적으로 누적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그 첫번째 이유가 있다.
의식을 통제한다는 것은 단순한 인지적 기술이 아니다. 이것은 감정의 몰입과 의지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앎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습관과 욕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자식이 활용되어야 하는 이 분야에서의 진보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더디기만 하다.
두번째 원인은 우리의 의식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에 관한 지식은 문화와 시간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급변하는 가운데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방법으로 우리의 의식을 통제하는 방법을 만들어 가야한다.
“어떻게 우리가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그 해결책은 우리의 의식을 통제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구체적으로 그 방법을 찾아가기 전에 먼저 간단하게 우리의 의식이 어떻게 움직이고 우리가 ‘경험’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 말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